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죽은 사람의 유복자 김처선은 어릴 적 친하게 지낸 폐비윤씨를 사모하여 그녀를 지켜보기 위하여 내시가 되었고, 윤씨도 마음으로는 김처선을 사모하고, 성종은 자신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윤씨를 질투하고, 그러다 윤씨는 폐비당하고, 김처선은 사랑하는 사람의 아들을 지켜 왕위에 오르는 걸 보지만 결국....이란 내용이다.
예고는 정통사극의 부활이라면서 줄거리는 퓨전사극 같다. 그리고 이 드라마, 시작부터 역사와는 어긋나고 있다.
김처선은 천만영화 '왕의남자'에서도 나왔는데, 장항선씨가 연기한 영화속 김처선은 목매달아 자살하였지만 이 역시 역사와는 다르다. 다들 허구로 알고 넘어가면 좋겠지만 분명 역사와 혼동하는 사람도 있을 것 이니 실제 역사 속의 김처선의 삶을 살펴 보자.
실록을 통해 보자니, 김처선의 생애도 다사다난했다. 그가 처음으로 실록에 이름을 보이는 것은 단종 1년인 1453년(새조 즉위 후 단종복위운동 직후에 태어났다는 드라마와는 전혀 다르다.) 유배당하였다가 석방하라는 명이 내려지는 기록에서다. 김처선이 왜 유배당하였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이 명이 내려진 날이 계유정난이 있은 지 불과 3일 후라는 점, 김처선에 대한 석방명령과 동시에 반대로 김종서 일파라는 이유로 유배당한 이들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김처선은 김종서 등의 조정대신에게 찍혀 유배당하였을 듯 하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고신도 환급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시련이 닥쳐온다. 금성대군의 반수양대군 운동에 연루되면서 다시 고신을 빼앗기고 쫓겨나더니, 결국 관노로 전락하고 만다. 이 사건에는 내시 엄자치도 연루되었는데, 엄자치는 계유정난 때 2등공신에 오른 인물이지만, 단종 폐위에는 반대했다가 제거당한다. 훗날 정조가 단종과 단종의 충신들을 기릴 배식단을 세울 때 여기에 배향된다. 이를 보면 김처선은 단종시대에는 엄자치 일파의 내시로 그와 함께 하면서 계유정난 직후에는 풀려났지만 금성대군 문제로 다시 화를 입은 것이다.
이렇게 김처선이 관노로 생을 끝마쳤다면 드라마 주인공이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처선은 엄자치는 이후 완전히 몰락한 것과는 달리, 가담정도가 가벼웠던 덕분인지 아니면 기록에는 남지 않은 처세술이 있엇던 것인지 세조 3년인 1457년, 관노에서 해방되고 3년후에는 원종3등공신이 되는데 이 3년사이에 내시로 궁궐에 복귀한 거 같다.
그러나 여전히 김처선의 내시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아서 직무유기로 곤장 맞기도 하고, 술마시고 실수를 하였다가 곤욕을 치루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세조의 후궁이 최연소 영의정 기록 보유자 귀성군 이준에게 반하여 연애편지를 보냈다가 귀성군과 그 아버지 임영대군의 자진신고로 발각된 사건이 있었는데, 김처선도 직접적이진 않지만 이 문제의 책임을 받아 화를 당할 뻔했으나 사건의 주모자들은 이미 처형 당하였으니 용서해준다는 세조의 조치로 무사할 수 있었다. 내시생활하기도 참 힘들다.
하지만 세조가 죽고 뒤를 이은 예종도 요절하여 성종이 즉위한 후로 김처선의 인생도 좀 순탄해졌다. 이 때는 자헌대부를 제수받아 관작이 지나쳤다는 사관의 평도 실려있고, 내시에게 높은 품계를 내리는 건 부당하다는 말도 있었지만 김처선은 성종의 신임을 받아 성종의 명으로 대신들을 방훈하거나 형옥을 둘러보면서 때로는 상으로 말도 하사받는 등의 호사를 누리며 중전이나 폐비와의 로맨스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으면서 순탄하게 지낼 수 있었다.
성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김처선은 능을 돌보는 시릉내시로 임명되었는데, 이 역시 성종이 김처선을 아낀 결과로 보인다. 이렇게 연산긴 치세 전반기에는 시릉내시로 있으면서 김처선은 <연산군일기>의 전반부에는 성종의 능인 선릉에 대한 일이나 말 한필을 하사받은 일을 제외하고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성종의 3년상이 끝난 후 궁궐로 복귀한 듯 하다.
그리고 연산군 10년인 1504년, 김처선은 무슨 이유인지 하옥당하여 장 1백대를 맞아야 했다. <연산군일기>에 구체적인 죄목은 나오지 않으며, 다만 연산군의 말에 따르면 "..무례한 일이 있으므로 죄주어야 하나.."라고 한다. 연산군의 생각으로 무례한 일이라면 사소한 실수로 밉보였다거나 간곡하게나마 직언을 올려서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듬해, 연산군은 김처선과 그의 양자 이공신을 죽인다. <연산군일기>애는 죽였다는 말만 있고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데 이 부분은 <연려실기술>에서 인용해보겠다.
김처선은 관직이 정2품이었다. 연산주가 어둡고 음란하였으므로 김처선이 매양 정성을 다하여 간하니, 연산주는 노여움을 속에 쌓아 둔 채 겉으로 나타내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궁중에서 임금이 처용(處容) 놀이를 하며 음란함이 도를 지나쳤다. 김처선은 집안 사람에게, “오늘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고 들어가서 거리낌없이 말하기를,“늙은 놈이 네 분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통하지마는 고금에 전하처럼 행동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연산주가 성을 참지 못하여 활을 당겨 쏘아서 갈빗대에 맞히자, 김처선은 “조정의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늙은 내시가 어찌 감히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오래도록 보위에 계시지 못할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하였다.연산주는 화살 하나를 더 쏘아 맞쳐서 공을 땅에 넘어뜨리고, 그 다리를 끊고서 일어나 다니라고 하였다. 이에 처선은 임금을 쳐다보면서,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다닐 수 있습니까.” 하자, 또 그 혀를 자르고 몸소 그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 내었는데, 죽을 때까지 말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거 그대로 영상화하면 18금 등급 확정이다. 물론 정사가 아닌 민간의 기록인 만큼 과장됐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연산군 보고 오랫동안 보위에 있지 못할 거라는 연산군 축출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는 점은 사실에 입각했거나 이 말이 아니라도 최소한 연산군에게 아주 강한 한방을 날렸을 거라는 건 확실해 보인다. 김처선을 잔인하게 죽인 점은 물론이고, 이후 김처선에 대한 연산군의 조치를 봐도 그런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김처선의 일에 연좌제를 적용하는 건 기본이었고, 김처선의 집을 못으로 만드는 것도 부족하여 연산군은 김처선의 처處자에 대한 사용금지 명령을 내린다. 공식문서에 사용하지 못함을 물론이요, 24절기 중 하나인 처서(處暑)도 조서(徂暑)로 고치라는 명을 내린다. 이러다보니 성몽정이라는 자가 문서에 문제의 처자를 사용하여 국문을 받다가 그 문서가 처자 금지령 이전에 쓰여진 것으로 확인되어 풀려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렇게 김처선을 증오하던 연산군은 결국 김처선의 말대로 오래지 않아 보위에서 쫓겨나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 후 즉위한 중종에게 일부 신하들은 김처선을 포상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중종은 술에 취해 한 말에 불과하다고 이를 허락치 않았다. 김처선이 술을 마신 건 사실이지만, 연산군의 이후 조치나 화살에 맞으면서도 끝까지 직언했다는 기록으로 보면 단순히 술에 취해 한 말이기보다는 평소의 소신을 가감없이 밝힌 거 같다. 적어도 연산군에게 아부떨다가 반정 당일에 얼굴 한번 비추거나 그거 조차 하지 않고도 줄 잘 서서 공신이 된 대신들보다는 김처선이 더 강직하고 용기 있었다. 그럼에도 별다른 포상을 내리지 않은 것은 내시에 대한 경계였을까, 아니면 무시였을까?
김처선의 직언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영조 27년인 1757년의 일. 이 때 영조의 명으로 김처선을 위한 정문이 세워진다. 그가 죽은 지 253년 만의 일이다.
예고는 정통사극의 부활이라면서 줄거리는 퓨전사극 같다. 그리고 이 드라마, 시작부터 역사와는 어긋나고 있다.
김처선은 천만영화 '왕의남자'에서도 나왔는데, 장항선씨가 연기한 영화속 김처선은 목매달아 자살하였지만 이 역시 역사와는 다르다. 다들 허구로 알고 넘어가면 좋겠지만 분명 역사와 혼동하는 사람도 있을 것 이니 실제 역사 속의 김처선의 삶을 살펴 보자.
실록을 통해 보자니, 김처선의 생애도 다사다난했다. 그가 처음으로 실록에 이름을 보이는 것은 단종 1년인 1453년(새조 즉위 후 단종복위운동 직후에 태어났다는 드라마와는 전혀 다르다.) 유배당하였다가 석방하라는 명이 내려지는 기록에서다. 김처선이 왜 유배당하였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이 명이 내려진 날이 계유정난이 있은 지 불과 3일 후라는 점, 김처선에 대한 석방명령과 동시에 반대로 김종서 일파라는 이유로 유배당한 이들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김처선은 김종서 등의 조정대신에게 찍혀 유배당하였을 듯 하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고신도 환급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시련이 닥쳐온다. 금성대군의 반수양대군 운동에 연루되면서 다시 고신을 빼앗기고 쫓겨나더니, 결국 관노로 전락하고 만다. 이 사건에는 내시 엄자치도 연루되었는데, 엄자치는 계유정난 때 2등공신에 오른 인물이지만, 단종 폐위에는 반대했다가 제거당한다. 훗날 정조가 단종과 단종의 충신들을 기릴 배식단을 세울 때 여기에 배향된다. 이를 보면 김처선은 단종시대에는 엄자치 일파의 내시로 그와 함께 하면서 계유정난 직후에는 풀려났지만 금성대군 문제로 다시 화를 입은 것이다.
이렇게 김처선이 관노로 생을 끝마쳤다면 드라마 주인공이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처선은 엄자치는 이후 완전히 몰락한 것과는 달리, 가담정도가 가벼웠던 덕분인지 아니면 기록에는 남지 않은 처세술이 있엇던 것인지 세조 3년인 1457년, 관노에서 해방되고 3년후에는 원종3등공신이 되는데 이 3년사이에 내시로 궁궐에 복귀한 거 같다.
그러나 여전히 김처선의 내시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아서 직무유기로 곤장 맞기도 하고, 술마시고 실수를 하였다가 곤욕을 치루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세조의 후궁이 최연소 영의정 기록 보유자 귀성군 이준에게 반하여 연애편지를 보냈다가 귀성군과 그 아버지 임영대군의 자진신고로 발각된 사건이 있었는데, 김처선도 직접적이진 않지만 이 문제의 책임을 받아 화를 당할 뻔했으나 사건의 주모자들은 이미 처형 당하였으니 용서해준다는 세조의 조치로 무사할 수 있었다. 내시생활하기도 참 힘들다.
하지만 세조가 죽고 뒤를 이은 예종도 요절하여 성종이 즉위한 후로 김처선의 인생도 좀 순탄해졌다. 이 때는 자헌대부를 제수받아 관작이 지나쳤다는 사관의 평도 실려있고, 내시에게 높은 품계를 내리는 건 부당하다는 말도 있었지만 김처선은 성종의 신임을 받아 성종의 명으로 대신들을 방훈하거나 형옥을 둘러보면서 때로는 상으로 말도 하사받는 등의 호사를 누리며 중전이나 폐비와의 로맨스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으면서 순탄하게 지낼 수 있었다.
성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김처선은 능을 돌보는 시릉내시로 임명되었는데, 이 역시 성종이 김처선을 아낀 결과로 보인다. 이렇게 연산긴 치세 전반기에는 시릉내시로 있으면서 김처선은 <연산군일기>의 전반부에는 성종의 능인 선릉에 대한 일이나 말 한필을 하사받은 일을 제외하고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성종의 3년상이 끝난 후 궁궐로 복귀한 듯 하다.
그리고 연산군 10년인 1504년, 김처선은 무슨 이유인지 하옥당하여 장 1백대를 맞아야 했다. <연산군일기>에 구체적인 죄목은 나오지 않으며, 다만 연산군의 말에 따르면 "..무례한 일이 있으므로 죄주어야 하나.."라고 한다. 연산군의 생각으로 무례한 일이라면 사소한 실수로 밉보였다거나 간곡하게나마 직언을 올려서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듬해, 연산군은 김처선과 그의 양자 이공신을 죽인다. <연산군일기>애는 죽였다는 말만 있고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데 이 부분은 <연려실기술>에서 인용해보겠다.
김처선은 관직이 정2품이었다. 연산주가 어둡고 음란하였으므로 김처선이 매양 정성을 다하여 간하니, 연산주는 노여움을 속에 쌓아 둔 채 겉으로 나타내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궁중에서 임금이 처용(處容) 놀이를 하며 음란함이 도를 지나쳤다. 김처선은 집안 사람에게, “오늘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고 들어가서 거리낌없이 말하기를,“늙은 놈이 네 분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통하지마는 고금에 전하처럼 행동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연산주가 성을 참지 못하여 활을 당겨 쏘아서 갈빗대에 맞히자, 김처선은 “조정의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늙은 내시가 어찌 감히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오래도록 보위에 계시지 못할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하였다.연산주는 화살 하나를 더 쏘아 맞쳐서 공을 땅에 넘어뜨리고, 그 다리를 끊고서 일어나 다니라고 하였다. 이에 처선은 임금을 쳐다보면서,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다닐 수 있습니까.” 하자, 또 그 혀를 자르고 몸소 그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 내었는데, 죽을 때까지 말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거 그대로 영상화하면 18금 등급 확정이다. 물론 정사가 아닌 민간의 기록인 만큼 과장됐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연산군 보고 오랫동안 보위에 있지 못할 거라는 연산군 축출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는 점은 사실에 입각했거나 이 말이 아니라도 최소한 연산군에게 아주 강한 한방을 날렸을 거라는 건 확실해 보인다. 김처선을 잔인하게 죽인 점은 물론이고, 이후 김처선에 대한 연산군의 조치를 봐도 그런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김처선의 일에 연좌제를 적용하는 건 기본이었고, 김처선의 집을 못으로 만드는 것도 부족하여 연산군은 김처선의 처處자에 대한 사용금지 명령을 내린다. 공식문서에 사용하지 못함을 물론이요, 24절기 중 하나인 처서(處暑)도 조서(徂暑)로 고치라는 명을 내린다. 이러다보니 성몽정이라는 자가 문서에 문제의 처자를 사용하여 국문을 받다가 그 문서가 처자 금지령 이전에 쓰여진 것으로 확인되어 풀려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렇게 김처선을 증오하던 연산군은 결국 김처선의 말대로 오래지 않아 보위에서 쫓겨나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 후 즉위한 중종에게 일부 신하들은 김처선을 포상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중종은 술에 취해 한 말에 불과하다고 이를 허락치 않았다. 김처선이 술을 마신 건 사실이지만, 연산군의 이후 조치나 화살에 맞으면서도 끝까지 직언했다는 기록으로 보면 단순히 술에 취해 한 말이기보다는 평소의 소신을 가감없이 밝힌 거 같다. 적어도 연산군에게 아부떨다가 반정 당일에 얼굴 한번 비추거나 그거 조차 하지 않고도 줄 잘 서서 공신이 된 대신들보다는 김처선이 더 강직하고 용기 있었다. 그럼에도 별다른 포상을 내리지 않은 것은 내시에 대한 경계였을까, 아니면 무시였을까?
김처선의 직언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영조 27년인 1757년의 일. 이 때 영조의 명으로 김처선을 위한 정문이 세워진다. 그가 죽은 지 253년 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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