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드라마에 대해서 딴지를 걸자면, 민비는 우리나라의 안녕을 위해 일본 세력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자기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바람에 일본 및 친일대신에게 낙인이 찍히게 됩니다.
이제- 뮤비를 봅시다. 뮤비에는 일본군이 조선의 구식군인들을 신병기로 제압하고, 그 사이에 낭인들이 침투하여 민비를 죽입니다. 그렇지만 실제는 어떨까요?
당시 조선 경복궁은 독일인 군사교관의 훈련을 받은 조선 최정예부대 시위대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양의 격발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명문의 자제들로 이루어진 엘리트 군대였습니다. 일본 공사관 경비대에게 무너질 병력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경복궁을 공격한건 일본 낭인들이나 경비대가 아니라, 조선 최고의 화력을 보유했던 훈련대였습니다. 훈련대는 서양식 대포와 후장식 소총은 물론이고, 역시 서양인 교관의 훈련을 받았으며, 최신식 게틀링 기관총까지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경복궁 경비대인 시위대는 경복궁을 지키는 고종의 친위부대에 불과하여 숫자가 적지만, 훈련대는 조선의 주력부대이기 때문에 수천명을 헤아렸습니다.
그러니까 일본군과 낭인들이 침투해서 죽인 것이 아니라, 친일파였던 훈련대장이 훈련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공격했습니다. 여기에 일본 공사관 미우라 등등 여러 친일대신들이 모의했습니다.
민비를 죽이는 일은 대의명분이 컸습니다. 왜냐구요? 민비는 전통의 유생들에게나 백성들에게나 원망의 대상이었고 저주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친일대신들은 힘들이지 않고 훈련대를 동원하여 민비를 죽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경복궁을 지키는 시위대와의 치열한 교전속에 민비는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고, 훈련대장이 직접 기름을 뿌리고 시신을 태워버렸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바와 다르게, 우리나라에서 일본은 동양의 수호자로 비춰졌기 때문에 오히려 민비를 죽인 것에 환영하느 ㄴ사람이 훨씬 많았습니다. 당시 민비는 화려한 굿을 벌이거나 불교 제전을 열어 국고를 탕진하고, 고종을 주무르며 충신들을 쫓아내고,(백성들의 신망이 높던 대원군도 이에 해당), 양이(서양국가)들에게 나라으 ㅣ이권을 팔아먹는 것으로 비춰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민비의 죽임으로 정변을 당한 친러파 대신들은 고종을 모시고 러시아 공관으로 가버립니다. 이것이 아관파천인데, 고종이 위협을 느껴서라기 보다는 일본도 범접할 수 없는 강국인 러시아의 힘을 빌리기 위해 친러파 대신들이 정변을 일으킨 것입니다. 친러파 수장을 죽인 것은 그려러니, 넘어가겠지만 러시아도 러시아 공관마저 습격당한다면 대군을 파견해 일본을 공격할것이 뻔했죠. 결국 친일대신들이 잡혀 옥에 갇히고, 그 수장에 해당하는 김홍집이 돌에 맞아 죽습니다. 친러파 수장 민비가 살해당한 것과 같은 이치죠.
후에 친일대신들은 대한제국을 고종에게 건의하여, 고종의 환심을 사 정계로 복귀하게 되고 러일전쟁의 일본의 승리로 조선 정계는 그들만의 천하가 됩니다.....
조선 백성들은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보여준 매너(?) 때문에 일본을 매우 높게 평가했습니다. 그래서 이용구등이 이끄는 일진회가 수십만명의 회원을 이끌게 되었던 것이죠. 구한말 조선인구가 1000만명 남짓이었던걸 생각하면 열성 일진회 회원이 40만명을 헤아렸다는 것은 의미가 큽니다. 다른 민족단체들을 다 합쳐도 40만명이 될까요?
그렇지만 일본은 1910년 국권을 침탈하고 무단통치를 벌여, 친일파들은 크게 실망하게 됩니다... 일본군 자체는 조선 사람들에게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않았지만, 일본군을 따라 들어온 일본 상인과 경관등은 조선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괴롭혀 일본에 대한 저항감이 싹트게 되고 후에 거국적인 3.1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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